[그랜저TG] 차량정보와 시승기 렌트카 정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반도체 집적도는 1년에 2배씩 증가한다는 법칙이 잘도 지켜지던데 자동차의 진보는 이렇게도 힘들단 말인가.
신형 그랜저(개발명 TG)에 혁명은 없었다. 대신 변혁, 아니 개선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그래도 실망스럽지는 않다. 한국차가 이만큼 컸구나 하는 생각은 든다. 사흘간 경험한 그랜저 L330은 부드럽고 경쾌하고 조용하다. 승차감도 한국의 도로사정에 안성맞춤이다.

각종 편의장치와 섬세한 터치는 감히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고 해도 이견을 달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초정밀 기술과 소름이 끼칠 정도의 장인정신, 엄청난 경험치를 동시에 요구하는 기본기로부터 나오는 내공은 여전히 부족했다. 쉽게 말해 전반적으로 차가 좋기는 한데 뭔가 허(虛)한 느낌이다. 잔재주는 늘었지만 자동차의 기본이 되는 동력계통과 핸들링의 숙성도가 문제다. 그러나 2류 탈출을 향한 고지가 멀지만은 않았다.

이제 5%만 더 노력하면 1류가 된다. 물론 마지막 5%가 모차르트와 경쟁자 살리에리의 재능만큼이나 극복하기 힘든 차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영원히 기억되고 살리에리는 소멸되지 않았는가. 현대자동차 경영진 연구진 노조는 힘을 합쳐 5년 뒤에는 남은 5%마저 정복하기를 다시 기대해본다. 앞서가는 독일 일본과 뒤쫓아 오는 중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살리에리처럼 잊혀져서는 안 될 것 아닌가.

▼디자인▼
근엄하면서도 날카로운 마스크, 화려한 뒷모습, 풍만한 엉덩이...
그랜저를 한 바퀴 빙 둘러보면 ‘그 놈 참 세련되고 잘 생겼네’하는 생각이 든다. 전조등이나 브레이크램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대적인 예술품을 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깨끗하게 잘 만들어졌다. 근데 앞 뒤 이미지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다.
1세대 전 토요타 캠리의 앞모습과 현재 혼다 어코드의 뒷모습을 빼닮았다.
귤화위지(橘化爲枳)가 아니라 청출어람(靑出於藍)인 것은 천만 다행이다. 원본보다는 확실히 고급스럽고 완성도가 높다. 이처럼 디자인 실력이 상당한데도 왜 ‘베끼기’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일본차의 이미지를 채용했을까.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현대가 베스트셀러인 캠리와 어코드 두 차종의 이미지를 조합해 북미지역 소비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서기 위해서였을까.

이미지야 어떻든 강렬한 얼굴과 LED램프를 적용한 리어컴비네이션은 만족스럽다. 특히 후륜 바퀴 윗부분의 불룩한 펜더는 성능에 비해 과장돼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차에서 볼 수 없었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곡선이다. 다만 화려한 앞뒤와 펜더에 비해 쏘나타의 모습이 남아 있는 밋밋한 옆면은 약간 언밸런스하다.


인테리어와 편의장치▼
오디오와 액정화면이 배치된 센터페시아의 디자인이 너무 단순한 것을 제외하면 만족스럽다. 계기판 우드그레인 시트디자인과 편의성이 프리미엄 클래스 수준이다. 선글라스 케이스에 들어간 금속몰딩과 재떨이의 2중 덮개, 폴더형 도어수납함, 플라스틱으로 감싼 트렁크 힌지 등을 보면 현대차가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시승한 모델은 선루프를 제외한 풀옵션이었는데 페달높이 조절장치, 트렁크 안쪽 손잡이, 시트의 전동 허리지지대, 전후상하 조절되는 전동 스티어링휠, 차체 자세제어장치(VDC), 공기청정기 등 황송할 정도로 많은 편의장치들이 배치돼 있었다. 실내공간과 트렁크도 넉넉하다. 실내폭은 과거 대형차급이며 천정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높다.

오디오는 평균 수준보다는 높았지만 썩 인상적이지는 않았고 7인치 액정화면과 대시보드에 내장된 DVD플레이어가 편리해보였다. 스마트키 시스템과 후방카메라 레인센서 세이프티윈도우 등 고급차종에 적용되는 첨단기능은 모두 구비했다.

그러나 각종
스위치류의 작동감각은 여전히 너무 가볍고 똑딱거린다. 10년 전에 비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차의 고급스러움에 비해서는 싸구려 감각이다. 적당히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게 작동하는 감촉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스위치를 만드는 하청업체에 납품단가를 너무 짜게 책정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동력성능▼
‘드디어 현대판 중형
스포츠세단이 나오는 건가’
제원표를 보며 떠오른 생각이었다. 3342cc 233마력 람다 엔진은 힘이 충분하다고 치더라도 자동변속기의 반응과 내구성은? 세계적인 변속기 전문업체인 독일 ZF나 일본 아이신(독일과 일본차의 상당수는 이 두 업체의 변속기를 쓴다)의 것이 아니라 ‘현대표’라면... 거기에다 차체(1689kg)가 무거운데도 연비까지 좋은 세팅이라면...
예상되는 주행성능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안타깝게도 예상은 적중했다. 무딘 가속페달의 반응, 부드럽지만 느린 변속, 하지만 충분히 빠르기는 하다. 힘은 세지만 미련한 곰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변속기의 성능이 좋고 수치상의 연비에 얽매이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다른 차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기어비의 세팅도 5단 100km/h 때 엔진회전수는 1800rpm에 불과해 연비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가속력 측정기와 스톱워치로 10번 이상 측정한 0->100km/h는 8.3~8.7초였고 0->400m 주파시간은 16초 초반. 0-160km/h는 19초대, 0-200km/h는 34초대였다. 고속도로 추월가속에 주로 이용되는 80->120km/h는 2단 5초 중반, 3단과 D모드에서는 7초 정도 나왔다. 150km밖에 주행하지 않은 새 차였기 때문에 1만km정도 주행하고 엔진이 부드러워지면 기록은 조금 더 좋아질 수 있다.

고속주행 능력을 보면 200km/h는 쉽게 도달하고 220km/h는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면 구경할 수 있다. 최고속은 GPS 측정기상으로 231km/h까지(제원상 230km/h 제한) 내봤지만 220km/h 이후 가속이 너무 더디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었다. 중저속 가속능력은 독일산 3000cc 중형세단과 비슷하지만 초고속영역은 독일산 2500cc급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지금까지 시승한 어떤 차보다 계기판이 정확했다. 150km/h까지 GPS측정기와 1%이내의 정확도를 보였고 200km/h를 넘어서도 2%에 불과했다. 정직했다.

이정도 달리기 실력이면 패밀리 세단으로는 제법 빠른 편이다. 물론 엔진출력과 5단 변속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달성해야 하는 수치이기는 하다. 문제는 가속의 품질과 운전자의 발끝에 전해지는 일체감이다. 급가속을 시도하면 0.5초정도 뒤에 차가 튀어나가고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도 조금 있다 엔진회전수가 줄어든다. 변속기의 반응도 느린 편이고 동력의 직결감도 떨어진다. 브레이크도 약간 밀린다.

가속페달과 엔진의 출력을 조절하는 스로틀보디가 과거의 케이블이 아닌 전기회로로 연결돼 있는 방식(스로틀 바이 와이어)인데 연비를 높이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초기 응답성이 늦고 둔감하게 세팅돼 있었다. 또 자동변속기도 동력직결감이 좋지 않고 변속시간이 길어 가속페달의 가감을 빠르게 했을 때 차의 움직임과 상당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차의 주행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빠르게 높은 단수로 변속돼 고갯길에서 가속페달을 밟아도 한참 있다가 가속되는 답답함을 느껴야만 한다. 엔진의 힘은 충분한데 그 힘을 필요에 따라 유효적절하게 꺼내 쓰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사실 ‘현대표’ 자동변속기는 문제가 많다. 동력직결감을 높이고 변속시간을 줄이려 해도 내구성 때문에 쉽지가 않다. 타이트하게 세팅을 하면 변속기 부품들이 견디지 못해 보증수리기간 이내에 교체해줘야 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 변속이 빠르면서도 변속충격을 줄이고 힘이 많이 필요한 고갯길에서 변속을 늦춰주는 상황대처능력도 부족하다.

변속기 전문재생업체 기술자들은 “현대차가 자체생산하는 자동변속기는 케이스와 내부에 들어가는 금속 부품의 강도가 약하고 고무류의 내구성도 떨어질 뿐만 아니라 열에 의해 쉽게 손상된다”고 입을 모은다. 변속기의 품질이 개선된다면 현대차에 대한 평가는 훨씬 높아질 수 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동력성능은 절대적인 파워도 중요하지만 가속이나 감속 때 운전자와 차가 함께 호흡하며 혼연일치되는 감성도 중요하다. 또 권투선수가 잽을 던지듯이 필요할 때 쉽게 엔진의 힘을 꺼내와 짧게 툭툭 끊어 치듯이 가속하고 감속할 수 있는 능력은 운전자에게 드라이빙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엔진과 변속기의 반응속도가 높고 내구성이 뒷받침돼야 하며 이를 관장하는 소프트웨어도 뛰어나야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그랜저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핸들링과 코너링▼
경쾌하다. 스티어링휠을 가볍게 좌우로 흔들어보면 차는 촐싹댄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반응한다. 그랜저XG에 비해 반응속도가 확실히 빨라졌다. 그러나 스티어링휠의 기어비(3.2회전-회전수가 많을수록 핸들링의 예민함은 떨어진다)가 낮아 차 전체의 움직임은 그리 빠르지는 않다. 때문에 반응이 빠르기는 하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면 다른 차들보다 약간 많이 돌려줘야 한다.

시속 120km에서 이리저리 차선을 바꿔보면 별로 출렁거리지 않고 재빠르게 이동한다. 어물쩡거리며 차선을 바꿔 앉는 모습도 이전 모델에 비해 줄어들었다. 차체가 높고 서스펜션이 부드러운 편이지만 차체의 기울어짐(롤링과 피칭)은 그다지 크지 않다. 렉서스의 동생쯤은 되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은 시속 160km까지는 유지되다 180km에 이르면 차선 변경이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200km를 넘어서면 차가 날린다는 느낌이다.

고속코너링과 짧은 턴이 반복되는 곳에서 한계까지 차를 밀어붙이면 아직 차체는 버텨낼 여력이 남아 있는데 약한 언더스티어를 내며
타이어가 먼저 비명을 지르고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순정 타이어가 부드럽고 조용하기는 한데 접지력은 실망스럽다. 타이어만 스포츠급으로 바꿔주면 서스펜션이 가진 잠재력을 더 꺼내서 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증가하는 노면소음은 감수해야 한다.

고속으로 올라갈수록 스티어링휠은 무거워지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가볍다. 손가락 하나로 돌려도 빙빙 돌아간다. 골목길이나 주차 때 여성 운전자에게는 편하겠지만 손끝 감각의 맛은 떨어진다. 그래서 그랜저의 운전 감각은 차를 몰아간다는 기분보다는 전자제품의 조작 또는 자동차 게임을 하는 듯하다.

핸들링과 가속반응의 싱크로나이즈도 떨어져 언밸런스하다. 옆 차선으로 끼어들며 추월하기 위해 스티어링휠을 돌리면서 동시에 가속페달을 밟으면 차는 벌써 옆 차선으로 절반쯤 옮겨 가는데 가속은 뒤늦게 일어난다. 현대차의 모든 부분이 10년전보다 획기적으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아직 각 기능간의 조화는 부족하다. 싱크로나이즈 수영에서 각 선수의 기량이 아무리 출중하고 예술적인 연기를 해도 손발이 맞지 않으면 메달획득의 가능성은 없다.


▼승차감▼
부드럽기는 하지만 과거 그랜저XG에 비해서는 단단해졌다. 그렇지만 노면의 충격도 잘 걸러준다. 불규칙한 노면이 많은 한국 실정에 어울리는 세팅이다. 과속방지턱을 조금 빠르게 넘었을 때 불필요한 여진을 남기지도 않았다. 이 정도라면 구입자의 80%는 만족할 것 같다. 다만 거친 노면을 지날 때 보조석 뒤쪽 서스펜션에서 간헐적으로 달그럭거리는 소리는 귀에 거슬렸다. 주행거리가 늘어나면 작은 충격에도 덜그럭거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노면소음 바람소리 실내 잡소리는 기대했던 대로 수준급이다. 거친 노면에서도 노면소음은 참을 만하다. 바람소리는 130km까지는 거의 들리지 않다가 그 이후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는데 160km를 넘어서면 조금 시끄럽다. 그 외에 실내에서 들리는 잡소리는 전혀 없다. 소음에 병적으로 민간한 사람이 아니라면 ‘Good’ 판정을 내릴 것이다.

시트의 착좌감도 뛰어나고 요추받침대와 헤드레스트도 체형에 맞게 잘 조절돼 오래 운전해도 허리가 아프거나 하지 않았다. 스티어링휠과 페달도 운전자에 체형에 맞도록 전동식으로 섬세하게 조정할 수 있어 운전의 피로도를 줄여준다. 옥의 티라면 변속기 D모드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이다. D모드에서 진동이 있느냐 없느냐로 차의 품질을 가늠하는 일반인들이 많기 때문에 사소한 듯하지만 중요한 문제다.

▼총평▼
휴게소에 들어가 주차를 하니 중년의 부부가 다가와 “한 번 구경해도 되느냐”고 물어본다. 차의 안과 밖을 둘러보더니 “디자인은 좋네. 차 조용해요. 승차감은 좋아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랜저의 수요층을 대변하는 질문일 것이다. 섬세한 핸들링과 가속반응 이런 것이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랜저는 참 잘 만든 자동차다. 편안하고 부드럽다. 그렇다고 너무 출렁거려 어지럽게 만들지도 않는다. 스티어링휠도 휙휙 돌아가 좁을 골목길을 빠져나가거나 주차하기도 쉽다. 렉서스가 지향하는 목표점과도 비슷하며 ES330의 80% 정도의 느낌은 준다. 시승차의 가격은 3924만원으로 비슷한 사양인 ES330(5490만원)의 71% 수준이다. 개인적으로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L330과 옵션이 비슷한 ES330의 미국 판매가는 4000만원으로 거의 같은 수준이며 한국의 부가가치세를 감안하면 400만원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그랜저는 지금도 충분히 편안하고 부드럽지만 변속기의 성능개선과 전체적인 기능의 조화가 이뤄진다면 한 단계 가치를 높아질 수 있다. 한국의 자동차가 모방의 단계를 넘어서 독자기술을 확보하고 주요부품의 국산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겪는 산통(産痛)은 1990년대 말에 극에 달했고 소비자들은 고스란히 그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아직은 진통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산후조리기간인 것 같다. 현대차가 산후조리에 신경을 잘 써주면 다음 세대 그랜저는 월드베스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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